
(책 2권의 모습)
베르나르 베르베르. 한국 사랑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시다. 집에 있던 책을 아는 동생에게 선물로 주기 전에 다시 한 번 인상깊은 단편들을 다시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오히려 단편이어서 더 여운이 컸던 것 같았다.
-환경 파괴범은 모두 교수형-
첫번째 단편이자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던 에피소드. 온실효과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조금이라도 화석 에너지를 쓰는 조짐이 보이는 인간은 모조리 죽여 없애는 세계가 된 지구. 공공차량도 모두 수작업으로 낑낑거리며 움직여야하고 먼 거리를 이동할 땐 투석기를 사용한다. 선풍기조차 다람쥐같은 꼬마 동물들이 챗바퀴 돌리며 전기를 일으키고 사람이던 동물이던 죽으면 곧바로 비료로 사용된다. 그러던 중 주인공은 금단의 과실이었던 화석에너지를 사용하는 물건을 쓰고 중독되며 즐기다 걸려서 죽는 결말이었다. 그냥 내 입장은 이렇다. "미래의 인류를 위해서, 온실 효과를 줄이기 위해서 정말 이 단편에 나온대로 그 X랄을 떨어야만 했었나?"
하지만 정말로 점점 현재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고 그 이유가 에너지 소모율이 높다는 말이 나와서 짜증이 솟구친다.
-꽃 섹스-
제목도 야했고 전개되는 내용도 야하면서도 웃겼다. 갑자기 전 인류가 고자가 되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됐는데 남자의 정액이 꽃가루가 되고 여성의 몸에선 나비를 이끌게 하는 분비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나비는 이 세상에 한 종류밖에 없는 나비였고 그 나비가 꽃가루와 분비물을 서로 섞어주고 소화시켜줘야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나비의 유충은 오직 한 종류밖에 없는 식물을 식량으로 삼았고 그 식물은 죽은 인간을 숙주로 삼았다고 한다. (비료로 사용되는 듯;;) 그래서 인류의 모든 생활방식이 자손 번식을 위해서 순식간에 바뀐 결말. 나중엔 수천년, 수만년이 흘러 식물모양의 인간이 되다가 마지막엔 나무 그 자체가 됐다.
심각한 불임과 야시시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신비로운 진화의 끝으로 변해버린 것.
-사라진 문명-
수십명으로 구성된 탐험대가 모두 죽고 혼자 남은 주인공이 지하에 떨어지고 그 안의 벽화를 보면서 멸망한 이종족을 살펴보는 이야기. 그런데 아무리 봐도 주인공이 본 거대한 이종족은 현대 인류 문명이었다. 태양계 곳곳을 식민지배하고 해저도 정복한 과학력을 자랑했지만 서로를 미워하는 증오심 때문에 서로 싸우기 시작해 모든 문명을 붕괴시켰고 스스로 지하로 후퇴하면서 몸뚱아리가 반지의 제왕 골룸마냥 구부정하고 못생겨졌다. 잠수함을 닮은 '잠토함'이라는 병기를 사용하며 계속 전쟁을 이어갔고 점점 문명도 퇴화해갔다 너무 지하로 내려가면서 전쟁했기에... 독가스를 마시고 모조리 멸종했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발견한 박물관에서 자신의 종족(화자와 책을 읽는 독자가 인간이라 믿었던 이들)은 결국 '개미'로 밝혀진다. 거대한 이종족들이 우리를 분석한 자료를 보았기 때문. 막판에 더듬이 드립이 나오면서 지금까지 모험을 한 존재는 개미였고 멸망한 어리석은 이종족은 인간으로 밝혀진다는 서술트릭이었다.
-영화의 거장-
1권의 마지막 에피소드였기에 의미심장했다. 3차 세계대전이 터져 전세계의 모든 유명도시들은 멸망하고 인류는 20억만 살아남는다. 비극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이는 역사, 종교, 국가라는 개념을 없애버린 것이다. 전세계에 존재했던 기념물, 역사적인 건축물, 역사를 기록한 책들, 설화, 종교시설, 미술작품을 모조리 없애버린다. 이 개념을 없애서 인간 자체가 무에서 태어난 개념으로 만들어 갈등을 없애려는 조치였다. 슬픈건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20억 중 겨우 1억이었고 이들은 모두 진압당해 멸종해버렸다. 이퀼리브리엄의 그 것(감정을 제거하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예술품들을 없앤 것)처럼 인류 문명의 모든 기억은 리셋된다. 대신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세계에서 영화제작붐이 다시 일어났는데.. 그중 '데이비드 큐브릭'이라는 감독이 나타나 모든 영화판을 휩쓴다. 그런데 이 감독은 배우들에게도, 관계자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로운 자였다. 여주인공이 상관의 부탁을 받고 데이비드 큐브릭을 만나러 그가 있다는 거대한 성으로 잠입한다. 알고보니 성 안의 넓은 공간은 폐허였고 꼭대기 최상부에서 큐브릭 감독이 홀로 늙어죽어가며 영화를 편집하고 있던 것. 큐브릭하면 누가 생각나는가?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천재 감독이다. 실제 이 작중에서 데이비드는 스탠리 큐브릭의 후손이다. 고조부로 불린다.
알고보니 감독의 성은 스위스의 거대한 요새시설로 밝혀진다. 데이비드는 영화로 번 돈을 LHC 입자 가속기를 재가동시키는 데에 투자하고 파리만한 로봇을 만들어 그 로봇을 과거.. 3차 대전 직전의 과거 지구로 보내 그 광경을 파리를 통해 녹화하고 그 것을 편집하여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미래의 그 어떤 영화보다 리얼하고 실제상황같은 연출로 사랑받은 것이다. 이는 범죄였다.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언급하는 '향수'에 젖은 인간이었기에. 그러나 여주인공은 엄청난 진실로 그를 차마 고발하지 못한다. 오히려 조용히 품 안에서 죽어간 큐브릭 대신 자신이 뒤를 이어 혼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계속 영화를 만든다. 61년 동안이나 계속.
그러나 결국 그녀도 죽고나서 진실이 밝혀지고 미래의 지구 의회는 결국 역사, 종교, 국가에 이어 사람들이 이름 '성씨'를 쓰지 못하게 하는 법칙을 만들어 그 족쇄는 쭉 이어진다. 앞으로 모든 인간의 성은 바코드마냥 숫자로 불린다. 큐브릭의 성에 있던 모든 영화시설과 영화들이 압수되어 사라졌다. 변하는 건 없었다. 앞으로 쭈욱 과거를 잃은 신인류의 세상으로 이어질 듯. 영화계도 다시 퇴화했다고 서술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한 편에 그리움이 남아 몰래 불법복사본으로 세간에 떠돌며 큐브릭과 여주인공이 만든 과거의 기억은 사람들에게 계속 살아남는다는 암시로 끝을 맽는다. 뭔가 여운이 느껴지는 단편이었고 개인적으론 영화의 거장 에피소드가 파라다이스 최고의 에피소드라고 생각든다. 영화로 만들어도 처음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비극을 보여주고 막판엔 새로운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리움에 빠진 훈훈한 슬픔으로 끝낼 듯한 분위기로 말이다.
-당신 마음에 들 겁니다-
확실히 심오한 에피소드였다. 드라마 각본을 받아들이기 힘든 거래자에게 불만을 받는 각본가 주인공의 불평으로 여겨질 법 했는데 알고보니 그 안에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개인의 의지보다는 남이 추천해준 것, 타인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가는 본성을 비판하는 에피소드였다. 집에 와서 인터넷 만남 사이트의 엄청난 수의 개인정보 입력란과 그를 통해 다가오는 맞선 상대의 정보, 소포로 온 책들의 내용, 밖에 나간 후 레스토랑에서 겪은 웨이터의 추천 대사 등으로 화가난 각본가 주인공은 사람들에게 '왜 남이 추천해준 거만 믿고 자기 뜻대로 행동 안 하냐' 는 투로 시비걸며 싸우다 쫒겨난다. 집에가서 계속 고민한 주인공은 알제리에서 보통선거가 일어난 직후 승리한 당이 선거제도를 없앴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면서 이 세상은 개인 의지를 죽이고 남의 뜻대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세상으로 변해간다며 절망하고는 자살하려 한다. 그 순간 전화가 오는데 아까 그 거래처 팀장이었다.
그런데 다시 팀장을 만난 각본가는 오히려 팀장을 협박하면서 무섭게 쏘아붙인다. 살인나나 했더니.. 오히려 다음 장면은 각본가의 말대로 만든(그 전에는 방송국과 시장의 현실 때문에 독특한 드라마는 못 만든다고 했는데 오히려 더 괴짜같은 드라마가 나온것) 드라마가 성공해서 인기인이 된 것. 원래는 과학수사를 다룬 드라마를 만드려 했는데 주인공이 심혈을 기울여 새로 쓴 각본은 '평소엔 극작가로 활약하다 밤이 되면 자기 의지를 억압하는 존재들을 찾아가 두들겨 패는 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여론조사에서 나온 시청자들의 바램을 정 반대로 골라서 만든 드라마였다고. 그리고 인터뷰하면서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라고(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말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상표 전쟁-
흔히 미래엔 기업이 국가를 잡아먹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 과정이 자세히 그려진 미래를 보여준다. 정치인들은 점점 사람들에게 미움받기 시작하고 반대로 기업인들은 그들의 탐욕에도 솔직한 서비스 때문에 정치인들보다 사랑받는다. 이젠 어느 나라에 태어났냐보단 어느 회사 소속인 것이냐에 따라 삶이 바뀌는 역사가 펼쳐진다. 모든 서비스와 복지는 기업들에게서 나온다. 기업의 세력권이 국가의 영토가 되고 기업들은 전쟁까지 일으킨다. 우주개척도 기업의 몫. 그거와 별개로 지구는 자원이 고갈되어 사람들이 태양계 행성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고 극 소수의 노인만 남아 과거 지구에 존재했던 물건을 파는 직업으로 연명하는 모습이 나온다. 수작업으로 만든 '꿀이 든 병' 하나를 비싸게 파는 것. 다른 미래를 그린 작품들에 의해 미묘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마지막까지 '아직 글쓴이는 기업들로부터 소송을 받지 않음!'이라는 멘트가 깨알같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슬람주의자에 의해 지구가 멸망하고 진화한 여성들만 살아남는다는 <내일 여자들은>이나 <농담이 태어나는 곳>을 최고의 단편으로 꼽는데 나는 <영화의 거장>과 <당신 마음에 들겁니다> 에피소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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