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by 정병석)'라는 책을 읽고 그 독후감을 나중에 공개하기 전에
(도서관 대출 자료라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인물에 대한 정보를 먼저 적기로 했습니다.
이 책은 대런 애쓰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했는가? (리뷰글 링크)'라는 명저처럼 제도적인 면에서 조선이 결코 성장할 수 없었던 이유를 여러 역사적 자료를 통해 보여주는 책이어서 놀라웠습니다. 읽다가 욱하겠지만 신빙성있다고 느꼈으며 개개인으로서 선비들은 기개있고 문화적으로 카리스마가 있을지 몰라도 집단으로서의 양반 관료들은 성리학을 고집하면서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줬다고 평했습니다. 그 안에서도 문제점을 발견하고 지적하려는 성리학자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는 내용을 포착했습니다.
밑으로는 인물들을 열거해봤습니다.
김육 : 청렴한 선비, 사리사욕이 없었으며 효종에게 대동법 시행 결의를 촉구함.
효종 임금 : 100년에 걸쳐 논쟁이 펼쳐졌던 대동법 문제를 강행함으로서 논란을 종결시킴.
(성리학자가 아닌 국왕이지만 대동법 같은 기득권을 흔들고 사회하위계층에게 도움을 주는 개혁을 위해선 '창조적 파괴'가 필요한 법인데 조선처럼 폐쇄적인 정치 시스템에선 기득권층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임금의 결의라는 점에서 효종의 결정을 극찬했었습니다. 다른 점에선 엉망이었을지 몰라도요)
하륜과 조준 : '경제육전' 편찬. 책에선 항상 거론하던 것이 '조선은 총론에 강하고 각론에 약한 법제를 갖고 있었다'라고 지적하나(물론 여기서도 15세기 전세계 기준으로 조선사회는 괜찮았다고 참작은 해줍니다) 그나마 교육중심문화를 확산시켜 오늘날에도 그 중요성을 유산으로 물려준 인물로 두 사람을 거론했음. 비록 성리학 편중이었으나 나라 전체에 학문과 교육을 중시하는 가치관과 의식이 생겨났다는 것임. 물론 현대 입시위주 교육이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는 게 문제지만.
수많은 장에서 조선을 계속 비판했기에 책 자체가 발암제일 수 있겠으나 4장만큼은 좋은 평가가 있었어요,
그게 바로 교육중심 문화와 인재선발 시스템이었습니다. 차탁용 제도가 그랬습니다.
차탁용 제도 : 순차 따지지 않고 품계를 뛰어넘어 인재를 발탁해 쓰는 제도. 이걸로 충무공 이순신이 등용됨.
(허나 나중엔 정략적 목적으로 요용되면서 유명무실화됨)
농암 유수원 : '우서' 집필. 직업분화를 통한 노동생산성 향상으로 부국강병을 주장. '국부론'을 발간한 애덤 스미스보다 40년 일찍 쓰였으나 조선 사회에 반영되지 못함. (심지어 대자본, 대상인 육성도 강조했던 성리학자임)
박제가 : '북학의' 집필. 성리학에 매몰된 사회를 비판. 실질적인 논의를 전혀하지 못하는 당시 조선을 무능한 사회로 규정했다.
이는 선비들이 중국과 일본을 다녀와 눈 앞에서 직접 훌륭한 점을 인정하지 않고 배울 생각도 없었으며 왜놈이니 되놈이니 비웃기만 했던 상황을 비웃은 것. 공리공담에는 유능할지 몰라도 실제 사무에는 무능하며, 목전에 닥친 일만 계획할 줄 알지 큰 사업 설계엔 어둡다고도 깠다. 조선 건국 이후 거의 무너진 해상무역을 전면강화하여 부의 축적을 주장함.
반계 유형원 : '반계수록' 집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회생시키기 위해 토지, 조세 제도, 인재선발, 교육, 노비, 군사 및 행정제도 등... 정치와 경제 전반을 전면 개혁하자고 주장함. 반계수록의 내용은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매우 훌륭했으나 책이 임금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사후 약 150년 후인 영조 45년 경이었고 이 마저도 책 일부만 반영되었을 뿐.
유득공 : '발해고' 집필. 이 사람은 멸망한 발해 유민들로부터 유물과 증언을 자료로 수집하여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고려 왕조는 물론 중국 역사와 문화만 숭상하는 사대부를 마구 까댔다. 실제 조선은 성리학자에 매몰된 선비들이 한국의 역사는 등한시 하고 중국바라기만 심했기에 (그것도 중국의 실무적 장점은 등한시하고 형이상학적인 주자학만 좋아했지 한국에 맞지도 않은걸 이식시키려 했고 그걸 아예 일반 백성들에게 강요한 점까지;;)
다산 정약용 : '목민심서'와 '경제유표' 집필. 지방 수령(사또)의 부임과 관련된 비리, 향리(아전)들의 횡포를 비판. 향리들을 지원하여 그나마 개혁적인 행동을 하려는 수령을 무력화시키는 지방유력자들의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 국가의 쇠약을 막기 위한 절차와 제도를 제시(유력자들을 감시하는 감독제도와 인센티브)했고 농민과 장인 숙련자를 선발하자고 주장.
허나 조정에선 이걸 인쇄해 보급할 생각조차 하지 않음.
남응운 : 명종 임금 시절, 노비가 날로 많아지고 양민이 줄어 나라가 쇠약해지고 기득권들만 강해지자 국익과 민심을 위해 가감하게 임금의 결단을 부탁했다. (위의 효종임금의 대동법 결의와 마찬가지로 기득권 반발을 막으려면 임금의 강행조치가 직빵이었다)
이전까지 노비들이 늘어났던 이유는 '종모법' 때문이었는데 천하의 세종대왕마저 기득권들의 반발때문에 고치지 못했던 것. 노비가 양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자식은 무조건 노비로 전락하는 제도였는데.
이게 '종모종량법'으로 개혁하여 노비와 양인 여자가 결혼하면 이제 그 여자의 자식은 양인이 되어 신분이 오르게 하는 것.
이렇게 되면 노비가 줄어들고 양인이 늘어나 '군사 자원이 늘어나 국가에 도움이 된다.' (노비는 군역이 없었으니) 그러나 남응운 생전에는 불가능했고 무려 영조 시기까지 가서야 종모종량법이 시행됨. 그 전까진 노비들이 계속 늘어났었다는 것임.
홍계희 : 유형원의 전기를 저술했으며 그의 주장을 옹호. 위에서도 나왔듯이 '총론에만 치중해 각론에 취약한' 선비들을 비판. 형이상학적인 철학보단 실무, 방법론을 중요시함.
성호 이익 : '성호사설' 집필. 관리들의 일을 제대로 하도록 감독하는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어기면 엄벌을 집행하도록 주장함. (근무태도 위반자는 10년 징역형을 때리고 사면도 금지시킨도록) '사후 실현된 사실상의 제도' (대런 애쓰모글루의 책에서도 일반적인 성문법보다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는 제도의 중요성을 중시합니다)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제도로 작동하도록 말이다!
*여기서 안타까운 점은... 정작 고대 중국의 유학서적이었던 <주례>는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행정조직으로 하여금 시장질서를 유지시키고 세금을 걷되 시장평화를 주선하며, 상품의 원활한 유통으로 돈이 제대로 돌게 하는 경제의 원리를 중요시했다. 결코 시장규제와 상공업 규제를 목표로 제정된 학문이 아니었다. 즉 조선이 유독 상업을 천시하는 해석으로 몰고 간 것이다.
안타깝게도 개혁적인 성향인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조차 상공업을 천대하고 억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김육 : 양반들이 군역을 면제받으니 국방재정이 취약한 것이라 판단하여 군제개혁을 주장. 그가 죽고 100년이나 지나 영조 임금의 시대가 되서야 '균역제'로 기득권층과 절충안을 찾았으나 이대로 물러설 관리들이 아니었기에 관리들은 새로운 고통을 백성들에게 안기면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김육은 생전에 중국 청나라를 다녀온 뒤, 전국 각지에 수레로 무역하자고 다시 주장했다.
*참고로 원래 중국에선 매우 험한 산지에서도 수레 무역을 잘만 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제가와 연암 박지원은 과거 세종 시대의 황희를 비롯한 수레 무역을 극구 반대했던 기득권 관리들을 까대며 매우 슬퍼했다...
조헌 : 중국 명나라 황실의 식재료 조달을 보고 충격을 받고 돌아와 조선의 '진상'제도 개혁을 주장.
중국에선 예전부터 황실이 '상선감'이라는 음식담당기관을 통해 각지의 특산품을 시장에서 은을 주고 구입했다.
하지만 조선에선 그냥 무상으로 조정에 바쳐야만 했기에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화폐나 물물교환을 통해 백성들로부터 음식을 구입하자고 한 것.
물론 성리학 지배층들은 그를 무시했고 이를 고칠 의지도 시장의 파이도 키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율곡 이이 : '율곡전서' 집필. 형이상학적인 도덕제일주의에 빠진 '사림파'들을 별로 안 좋게 생각했지만(실제로 평가가 더 나쁜게 사림이죠;;) 그나마 그 중에서도 개혁적인 성향의 조광조를 눈여겨봤고... 그 조광조조차 그의 경세치용 학문이 충분히 성숙지도 않았는데도 다른 관료들과 토론하며 조정하려 들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기에 바빴으며 자기만의 이상을 급격하게 밀어붙이다가 파멸해 죽었다고 대차게 깠다. 그의 절충적인 개혁이 망하면서 조선의 국력이 쇠퇴해진 걸 비판한 것.
*그나마 위의 열거한 사람들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성리학자들로 가득했던 이 땅에 그나마 전면적인 개혁성향이 강했던 인재들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불행하게도 이들의 주장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못한 점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덧글
수레의 경우도 쉘를 쓸 만큼 경제 교류가 활발하니까 수레를 쓴 거지 수레를 안 써서 경제교류가 부족한 게 아닌데 선후관계가 잘못 본 경우가 많아서요
중국이야 워낙 커서 그렇다지만 일본하고 비교해서 조선이 수레를 꼭 못써야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댁들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라는 한가지논리로 움직이고 있는 것임......
가장 유력한 답은 조선이 재정을 확충하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국가운영자체를 모르고
세수를 민간에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풀기보다 동원하고 징발로 떼우니 상업경제가 주변국대비
전무하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